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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금융가 생존기 | 4개 이름으로 살았던 재일조선인의 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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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금융가 생존기 ❘ 4개 이름으로 살았던 재일조선인의 실화
가면 속의 동포애 ❘ 야쿠자와 거래하며 살아남은 재일조선인 금융맨

📜 실화가 만화보다 더 극적인 이유
오사카 금융가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재일조선인 2세의 파란만장한 이야기. 4개의 이름으로 살았던 소년은 어떻게 야쿠자가 득실대는 금융업계에서 자신의 길을 찾았을까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본 오사카에서 실제로 있었던 한 재일조선인 가족의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드리려 합니다. 이 이야기는 유튜브 채널 '이웃집 오오카와상'을 통해 알려진 실화로, 9살에 홀로 일본으로 건너간 종학 씨의 아들 창호 씨가 오사카의 거친 금융 현장에서 겪었던 만화보다 더 극적인 삶의 여정입니다.

📖 재일조선인, 그들은 누구인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재일조선인이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024년 말 기준으로 일본에는 약 43만 명의 재일 한국-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과 그 자손들입니다.

💡 재일조선인의 역사적 배경
재일조선인의 일본 이주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뉩니다.
- 제1기(1910-1938)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농민층이 몰락하면서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입니다. 1915년 약 4천 명이었던 재일조선인은 1920년에 3만 명으로 급증했습니다.
- 제2기(1939-1945)는 강제연행에 의한 이주 시기이며,
- 제3기는 일본 패전 후에도 여러 사정으로 일본에 남게 된 시기입니다. 종전 당시 일본에 있던 조선인 중 약 20%인 60만 명이 일본에 잔류했습니다.

특히 오사카는 재일조선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로, 제주도 출신의 비율이 상당히 높습니다. 오사카는 역사적으로 일본의 상업 중심지였으며, 1980-90년대에는 스미토모, 산와, 다이와 등 대형 도시 은행들이 본사를 둔 금융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오사카에서 창호 씨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 이름이 4개였던 소년의 정체성 찾기

재일조선인들에게 일본식 이름, 즉 '통명(通名)'은 단순한 별칭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빈곤과 멸시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존의 가면이었습니다. 창호 씨 역시 어린 시절 '사토시'라는 일본 이름으로 불리며 일본인처럼 키워졌지만, 그에게는 무려 4개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 통명 제도란?
통명은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사용하는 일본식 이름입니다. 재일조선인의 경우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으며, 현재도 법적으로 인정된 또 하나의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일본 사회에서의 차별을 피하고 일상생활의 편의를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명과 통명을 함께 외국인등록증에 기재할 수 있으며, 계약이나 공식 문서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 어른들의 결단으로 중요한 변화가 찾아옵니다. 창호 씨와 형제들은 멀리 떨어진 조선학교로 전학하게 된 것입니다. "아이들이 조선말을 배워야 한다"는 할머니와 부모님의 필사적인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전학이 아니었습니다. 창호 씨 가족이 일본 사회에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고,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겠다는 중요한 분기점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재일조선인 가정이 자녀들을 일본 학교에 보내고 일본식 이름만 사용하도록 하는 추세였던 점을 고려하면, 이는 매우 의미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 오사카 금융가의 거친 현실

성인이 된 창호 씨는 아버지 종학 씨가 이루지 못한 꿈인 부동산과 금융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가 취직한 금융회사는 매우 독특한 곳이었습니다. 직원 30명 중 25명이 재일조선인이었을 정도였으니까요.

회사의 직원들은 대부분 몸집이 크고 눈매가 날카로운 '무서운 인상'이었고, 겉모습이 약해 보이는 이들은 대개 머리가 비상했습니다. 이런 구성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 회사가 다루는 업무의 성격 때문이었죠.

⚠️ 금융업계의 암묵적 룰
이 회사의 수칙은 원래 "야쿠자와 조선인에게는 돈을 빌려주지 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실적을 채우기 위해 이 원칙이 자주 깨졌습니다. 야쿠자에게도 돈을 빌려주고, 때로는 그들로부터 직접 돈을 회수해야 하는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마치 만화 '나니와 금융도'의 현실판이었습니다.

창호 씨는 이런 환경에서 생존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예리한 안목과 빠른 판단력이 필요했습니다. 상대방의 신용도를 파악하고, 위험을 감지하며, 때로는 강경하게 대응해야 했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부동산 전문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됩니다.

💡 오사카 금융업의 특징
오사카는 에도시대부터 '천하의 부엌'으로 불리며 일본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1925년 일본 최초의 증권회사 노무라 증권이 오사카에서 설립되었고, 1980-90년대에는 대형 도시 은행들의 본사가 밀집해 있었습니다. 금융업이 발달한 만큼 경쟁도 치열했고, 다양한 금융 서비스가 존재했습니다. 재일조선인들은 주류 금융권 진입이 어려웠던 시절, 이런 중소 금융회사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았습니다.

🎭 가면 속의 동포애

금융 업무 중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상대방이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때였습니다. 서로 일본 이름을 쓰고 있어도 대화하다 보면 상대의 정체가 탄로 나곤 했습니다.

👤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이시하라 상, 고향이 어디요?"
"너, 한가(韓家)냐?"
"오야(두목)는 누구고?"

이렇게 건너건너 아는 사이임이 밝혀지면, 묘한 동질감과 복잡한 상황이 얽히곤 했습니다. 같은 민족이라는 유대감과 비즈니스의 공정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죠. 창호 씨의 회사는 이런 경우 즉시 담당자를 교체하는 방식으로 대응했습니다. 공정한 업무 처리를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재일조선인 사회의 복잡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일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고 일본인처럼 행동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알아보고 연대하는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 재일조선인 사회의 특징
재일조선인들은 일본 사회에서 차별을 경험하면서도 독자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했습니다.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같은 조직을 중심으로 민족 교육을 시행하고, 경조사를 함께하며 네트워크를 유지했습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서로를 돕는 암묵적인 연대가 존재했지만, 동시에 공정성과 프로페셔널리즘을 유지하려는 노력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못 이룬 꿈, 자격으로 증명하다

창호 씨의 아버지 종학 씨는 9살에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늘 강조했습니다. "실력을 쌓아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고요.

이 말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나라의 일원으로서 일본에서 당당히 부동산 자격을 갖추고 일하는 것, 그것은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존재 증명이었습니다. 실력으로 인정받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자격을 갖추는 것이 재일조선인으로서 살아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던 것이죠.

창호 씨는 금융업에서 쌓은 예리한 안목과 직감을 토대로 결국 아버지가 간절히 원했던 부동산 전문가로서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커리어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 창호 씨의 회고
"금융업에서는 '여우의 변신술'을, 부동산업에서는 '너구리의 몸놀림'을 배운 것 같습니다."

이 한 문장에는 일본 사회의 거센 파도 속에서 재일조선인이라는 뿌리를 잊지 않으면서도, 생존을 위해 영리하게 대처해야 했던 그들의 삶이 녹아 있습니다.

창호 씨의 성공은 단순한 개인의 성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경계선 위에서 살아온 재일조선인 가족의 유대가 다음 세대로 이어져 결실을 본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종학 씨가 9살에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겪었던 고난, 자녀들을 조선학교에 보내기로 한 가족의 결단, 그리고 창호 씨가 금융업계에서 쌓은 경험까지,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 마치며: 경계선 위에서 피어난 생존의 기술 : 정리 동영상 보기

창호 씨의 삶은 마치 거친 정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변 환경에 맞춰 색을 바꾸면서도, 심장만큼은 본래의 색을 잃지 않는 카멜레온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일본 사회의 일원으로 완벽하게 동화된 듯 보였지만, 그 내면에는 가족과 고향, 그리고 민족의 자부심이라는 단단한 뿌리가 흔들림 없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5년 현재, 재일조선인은 3-4세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일본어에 유창하고 일본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지만,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창호 씨의 이야기는 이런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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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재일조선인은 현재 몇 명이나 되나요?

2024년 말 기준으로 한국 국적자는 약 40만 9천 명, 조선적은 약 2만 3천 명으로 총 43만 2천여 명입니다. 이 중 특별영주자는 27만 4천 명 정도입니다. 누적 귀화 허가자 수는 37만 9천여 명에 달합니다.

Q: 통명은 지금도 사용하나요?

네, 현재도 많은 재일조선인들이 통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통명은 외국인등록증에 본명과 함께 기재할 수 있으며, 법적으로 인정됩니다. 일상생활의 편의와 차별 회피를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최근에는 본명을 당당히 사용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Q: 조선학교는 어떤 곳인가요?

조선학교는 재일조선인들이 민족 교육을 위해 설립한 학교입니다. 한국어(조선어)와 한국사, 한국 문화를 가르치며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현재 일본 전역에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다양한 조선학교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Q: 재일조선인은 왜 오사카에 많이 거주하나요?

오사카는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의 주요 공업 도시이자 항구 도시였기 때문에 일자리를 찾아 많은 조선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특히 제주도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 제주도 출신이 많으며, 해방 후에도 본국과의 네트워크가 약했던 사람들이 오사카에 많이 남았습니다.

Q: 재일조선인들은 현재 일본에서 어떤 차별을 받나요?

과거에 비해 많이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취업 차별, 교육 차별, 혐오 발언 등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1991년 한일 합의로 지문날인 제도 철폐, 지방공무원 임용 확대 등이 이루어졌지만, 참정권 부재와 사회적 편견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ℹ️ 이 글은 유튜브 채널 '이웃집 오오카와상'의 영상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정보는 2025년 1월 기준 공식 통계와 학술 자료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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